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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누구나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인간이 하는 운동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운동이다. 걷는 것은 몸 전체를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 시키는 것으로 단순해 보이는 동작이지만,이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관절, 뼈, 근육, 신경 등이 모두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 이 중 한 부분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정상적인 걷기가 불가능해진다. 많은 현대인들이 운동 부족으로 인해 예전보다 체력이 떨어져 있기도 하고 많은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 운동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막상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시간, 장소, 비용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운동을 꾸준히 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걷기는 시간, 장소, 비용문제 모두에 구애 받지 않으면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운동이다. 걷기는 어떻게 걷든지 간에 걷는 방법은 모두 동일하다. 다만 걷기의 숙련 정도에 따라 팔의 위치와 발을 놓는 위치가 속도에 맞게 변할 뿐이다. 걷기의 종류는 속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완보 (천천히 걷기) : 걷기의 첫 단계로서 기초연습단계이다, 산보 (산책 걷기) : 일상생활에서 보통 속도로 걷는 방법이다, 속보 (빠르게 걷기) : 팔을 앞뒤로 자연스럽고 활기차게 움직인다, 급보 (급하게 걷기) : 유산소성 운동능력의 향상을 극대화하여 성인병의 예방 및 치료에 효과적인 걷기 방법이다, 강보 (힘차게 걷기) : 일반인들이 최고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걷기 방법이다, 경보 (경기 걷기) 등이 있다.
오늘날 검도경기의 원형은 격검(擊劍)이다. 중국의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는 격검이 상대와 일 대 일로 겨루는 무술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군자국의 예로 보아 일찍부터 이 격검이 행하여졌을 것이나 그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라 화랑들이 격검을 수련하였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의 김유신조에 보이는 '검술을 연마하여 국선이 되었다.'라는 내용에서 격검을 잘하지 못하면 최고의 화랑인 '국선'이나 '풍월주'에 오를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삼국사기>나 <화랑세기>에는 화랑들이 월정(月庭)과 같은 일정한 수련장소에 모여 체계적으로 격검을 수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깊은 산악이나 동굴에 들어가 극기훈련과 심령훈련까지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검기(劍器) 역시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삼국 모두가 동양 최고의 수준에 올라 있었다. 이러한 칼의 기능과 기기(技器)가 후대에 일본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검도의 모태가 된 것이니, 이는 누구도 부인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근대 수백 년간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무(武)를 경원하고 칼에 관해 소홀히 하면서 자괴(自愧)에 빠져들었으나, 중국의 <무비지(武備志)>에 소개된 유일한 검법인 <조선세법(朝鮮勢法)>과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검법인 <본국검법(本國劍法)>은 세계검도사에 큰 빛이 되고 있는 것이다. 죽도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가격함으로써 승부를 겨루는 투기 스포츠이다. 가격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손목, 머리, 허리, 목 등으로 정해져 있으며 경기자는 호구를 착용해야 한다. 검도의 수련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예절과 수련에 앞서 갖추어야 할 것을 배운다. 그 다음에 기본자세와 기본동작을 습득하고, 그 뒤에 대전연습과 본연습(本{練習), 그리고 시합연습에 들어간다. 기본자세에는 상단(上段)·중단(中段)·하단(下段)이 있으며, 각기 공격과 방어에 적합한 특성을 가진다. 검도의 목적은 운동을 통하여 심신을 단련하고 인격을 수양하며, 건전한 여가선용을 하는 데 있다.
게이트볼은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게 되었다. 1980년 대 초반 정부는 스포츠 입국을 강조하며 스포츠 정책을 표방하던 시기이다. 이를 위해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고, 1982년 체육부 설치,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프로씨름 등이 출범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전반에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경제 성장으로 인한 새로운 여가가 필요한 여가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또한 사회 발전으로 인한 노령화 사회로 노인 체육의 관심이 일기 시작하던 시기였다.이러한 한국의 사회적 배경에 1980년대 초반 일본 게이트볼이 성행한 점도 한국에 게이트볼이 도입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1980년 대 초반 일본에서는 사회전반에 노령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생활체육의 열기가 매우 고조된 상태였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 사회에서 게이트볼이 전국적인 노인 스포츠로 자리잡고 큰 인기와 더불어 참여하는 동호인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게이트볼의 보급의 눈을 해외로 돌려 관광객이나 이민자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분위기는 한국에 게이트볼이 들어오는데 기여하였다. 실제로 한국 게이트볼은 일본 게이트볼 동호인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국내 게이트볼 동호인들을 조직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 게이트볼은 무엇보다 노인체육의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도입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골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양을 기르던 목동들이 끝이 구부러진 나뭇가지로 돌멩이를 날리는 민속놀이가구기로 발전했다는 설과 기원전 네덜란드에서 어린이들이 실내에서 즐겨하던 콜프(kolf)라는 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또한 네덜란드의 콜벤이라는 오늘날의 크리켓이나 아이스하키와 비슷한 구기가 14세기경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에 전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15세기에는 골프가 지나치게 성행하여 국민의 무도(武道)와 신앙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칙령으로 전면금지하거나, 안식일에는 플레이를 금지 하였다. 골프는 귀족계급에도 만연되어 왕도 즐겼으며, 16세기 이후에는 신분의 상하를 불문하는 스포츠로까지 발전되고, 잉글랜드에까지 파급되었다. 골프를 ‘Royal and Ancient Game’이라고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골프에 관해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1744년 스코틀랜드에서 지금의 에든버러 골프인협회의 전신인 신사골프협회가 조직되어 경기를 한 것이 골프 클럽과 경기대회의 시초이다. 처음에는 실버클럽대회라 하여 실물 크기로 만든 은제 트로피를 만들어 쟁탈전을 벌였다. 이 협회의 의사록에는 13개조로 된 세계 최초의 골프규칙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현행 골프규칙의 기반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 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각지에 골프클럽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선수권대회 형식의 경기도 시작되었다.
국학(단학)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국연방(桓國聯邦)의 한인천제는, 인간은 누구에게나 인간의 실체인 신성(神性 혼, 自我)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하였으며 이러한 수행법은 '신선도(神仙道)‘풍류도(風流道)’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왔다. 이 깨달음의 법은 신시배달국을 세운 제1세 한웅천황(거발한 한웅)에게 전해졌으며 한민족의 건국이념이 들어 있는 3대 경전인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을 통하여 후대에 전달되었다. 고조선시대인 단군조선 제 1대 단제(단군왕검) 때에는 단학이 집대성되고 널리 보급되어, 우리 민족은 선도를 통해 심신의 단련뿐 아니라 깨달음을 추구하며 살았고, 깨달음의 문화를 꽃피워 이웃의 국가나 종족들에게 전했다. 삼국시대 국학(단학)의 전통은 삼국 시대의 국가인재양성제도로 이어졌다. 100만 수나라 대군과 30만 당나라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고구려의 기상은 국학(단학)수련으로 심신을 연마하였던 을지문덕, 을파소, 양만춘, 연개소문 등 조의선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신라의 화랑들도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는 수행자들이었으며 그들이 단전을 두드리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산을 울렸다고 한다. 또한 백제에서도 문무도를 통해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고려시대 단학은 고려 초기에 국자랑 제도로 계승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동학의 정신과 외세침입 때마다 일어난 의병들의 정신으로 겨우 그 명맥만이 이어져 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국학(단학)의 맥은 거의 끊기게 되었으나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 우는 홍암 나철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으로 계승되어 간신히 흘러오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단전호흡이나 한민족의 전래 심신수련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붐을 일으켰다. 현대 국학(단학)은 1980년 이래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일지 이승헌총장에 의해 그 정신과 수행법이 뇌과학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계승하게 되었으며 한민족의 전통무예로 심신단련법인 생활체육으로 발전되었다.
일찍이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일컬어 동이족(東夷族)이라 하였는데, 동이(東夷)의 이(夷)는 대(大)와 궁(弓)의 합성어로 “동쪽의 활 잘쏘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선사시대부터 활쏘기를 즐겨하고 궁시(弓矢)의 제작기술이나 다루는 능력이 주위 어느 민족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도는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슬기와 빛나는 얼이 깃든 자랑스러운 전통무예로서 삼국시대부터 국민을 훈련시키는 주된 방법으로 사용되어 이를 통해 한민족의 웅지와 진취적 기상을 배양함으로서 우리 겨레의 패기와 활달한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한 전통무예이다. 이를 바탕으로 평시에는 심신단련 및 정신수양의 방편으로 삼았으며, 유사시 국가를 방위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에는 활의 사용과 발달을 꾀하여 그 종류도 다양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현재까지 전래된 것은 오직 각궁(角弓)뿐이다. 이렇듯 전통무예인 궁도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무예이자 정신문화로서 오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자랑스러운 전통스포츠이다. 그런 관계로 일제강점기때 일본은 완전한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말살시키려 했고 그 결과 수천년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온 궁도가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뜻있는 인사들이 우리의 전통무예인 궁도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였던 바 대한궁도협회 전신인 조선궁술연구회가 1922년 7월 11일 서울 황학정에서 발기인 35인으로 창립하였으며, 1926년 5월 20일에는 조선궁술연구회를 조선궁도회로 개칭하였으나, 1945년 광복 때까지 유명무실하다가, 광복 후인 1946년 2월 10일 조선궁도회로 부활하여 활동을 시작하다가 1948년 8월 25일 조선궁도회를 대한궁도협회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1954년 대한체육회에 가맹단체로 가입하였고, 1962년 3월 전통궁이 아닌 양궁을 도입하여 각급학교에 보급시켰으며, 1963년 7월 27일 국제양궁연맹(FIT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되었고, 1983년 양궁 분야를 대한양궁협회로 분리시켜 대한궁도협회에서는 전통스포츠인 궁도만 전담하고 있다. 궁도는 활을 이용하여 목표물에 얼마나 정확히 맞추는지를 겨루는 스포츠로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활을 사용한다. 활은 총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원거리에서 적을 공격하는 대표적인 무기였으나 효용 가치가 떨어지게 됨에 따라 옛 선인들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무예 종목으로서 발달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서양에서 전해진 양궁과 함께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 종목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궁도 경기에는 이충무공탄신기념대회, 대통령기쟁탈 전국 시·도 대항 궁도대회, 전국남녀 궁도선수권대회, 전국남녀중고등학교 궁도대회, 전국 궁도종합선수권대회, 전국체육대회 등이 있다.
그라운드골프란 골프를 재편성한 스포츠로서 1982년에 일본국 돗도리 현 도마리손 생애스포츠 활동추진사업의 일환으로 도마리손 교육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그라운드골프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지 않고 규칙도 간단하기 때문에 초심자도 금방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 손쉽게 즐기고, 체력 다지기, 동료 만들기, 커뮤니티 만들기를 할 수 있다.생애스포츠의 연구가 전 오사카교육대학의 시마자키 교수와 돗도리 현 내의 유직자로 조직한 다지기 생애스포츠 활동추진전문위원회가개발, 룰의 책정에 몰두해, 실제로 도마리손의 고령자 모두에게 그 원안을 시도해 보고, 개량에 개량을 더해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 왔다. 우리나라에는 1993년 충북음성과 경북경주에서 경기를 시작하였다. 골프채와 비슷한 나무채로 게이트볼처럼 공을 굴려 쳐서 직경 36cm 홀에 넣는다. 홀 포스트에 최소 타수로 경기를 끝낸 사람이 이긴다. 보통 잔디 축구장을 빌려 최장 50m 짜리 홀을 비롯해 16홀을 만들 수 있다. 구멍을 뚫지 않고 공을 집어넣을 수 있는 홀 깃대를 세우기 때문에 잔디밭에 손상이 가지 않는다. 그라운드골프 홀 포스트는 인코스 4개, 아웃코스 4개 등 8홀이 기본이다. 한 팀에 6명이 기준이지만 인원수 제한 없이 경기를 즐길 수 있다.
2004년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고안된 나비골프는 골프에서 파생된 신종 골프 스포츠이다. 공이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 사뿐히 내려앉는다고 하여 나비골프라 칭하게 되었다. 나비골프는 운동내용이 과격하지 않고 남녀노소 모두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가족형 레포츠이다. 프로나 아마추어, 체격이나 체력상의 차이, 빈부의 차이를 극복하고 친구와 가족 모두 함께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 스트레스도 해소할 수 있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으며 가족 화목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비골프의 스윙은 일반 골프 스윙보다는 좀 더 단순한 스윙으로 목표지점에 정확하게 보내는 경기이기 때문에 스위의 기본 원리만 이해하면 쉽게 포인트 게임이나 골프장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매우 쉬운 경기이다.
여성에 맞게 규격과 규칙이 조정된 농구와 흡사한 스포츠이다. 1895년 영국 여자들이 미국에서 경험한 농구를 들여와 여성에게 맞게 룰을 개정하여 소개한 것이 시초이다. 넷볼이란 명칭은 골포스트에 붙어 있는 바스켓을 링과 네트로 명칭을 구분하여 사용한 데서 유래하였다. 20세기 초 영국 사람들이 식민지로 이주하면서 세계에 알려졌다. 현재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에서 활성화 되고 세계선수권 대회까지 개최되어지고 있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는 1963년부터 4년마다 개최되고 영연방 국가 간의 경기인 ‘영연방 경기(Common Welth Game)’의 주 종목이기도 하다. 격렬하고 힘든 농구와 달리 몸이 부딪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알맞은 스포츠이다.
1881년 미국의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YMCA 훈련학교의 체육부장 이었던 L. Gulick 박사의 지시에 의해 학교 체육 지도자였던 J. Naismith(1861~1939)가 겨울철에 즐길 수 있는 실내 스포츠로 창안하였다. 그는 처음에 체육관 양쪽에복숭아 상자를 하나씩 달아 놓고 공을 던져 그 가운데에 공이 머물렀을 때 골인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전 세계로 보급되어 마침내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부터 정식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우리나라에 농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07년 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초대 총무이자 미국인 선교사인 길레트(P.Gillett:한국명 吉禮泰)에 의해서이다. 1916년 3월 25일 미국인 반하트가 기독청년회 간사로 부임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지도 보급이 이루어졌다. 1925년 9월에는 조선바스켓볼협회가 창립되었고 본격적인 농구훈련 및 지도가 시작된 것은 1927년 3월 당시 일본 도쿄 YMCA 체육부 간사인 F.브라운을 초빙하여 농구 강습회를 개최하면서부터였다. 1931년 4월에는 조선농구협회와 조선농구심판협회가 탄생하였다. 1945년 12월 19일 조선농구협회가 재창립 되었으며, 1948년 KBA(Korea Basketball Association:대한농구협회)로 개칭하였다. 또한 1946년 대한체육회에 가맹하였고, 1947년 FIBA(Fdration Internationale Basketball Association:국제농구연맹)에 가입하였다. 1963년에는 ABF(Asia Basketball Federation:아시아농구연맹)에 가입하였다.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는 1960년대의 걸출한 선수, 박신자 이후 출현한 박찬숙 등이 활약하여 아시아의 강호 중국 등을 물리치고 은메달을 차지함으로써 역대 올림픽 참가 이래 처음으로 단체 구기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하였다. 1983년부터는 한국 최대 규모의 성인 농구대회인 농구대잔치가 개최되었으며, 1997년에는 프로농구리그가 창설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 이후에도 각종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생활 체육으로서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인기 스포츠가 되었다.
다트의 시초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영국의 백년전쟁(1337~1453) 당시 영국의 병사가 전쟁 중 여가시간을 보낼 때에 활과 화살로 특정의 목표를 노리고 서로 경쟁한 것이 근대 다트의 기원으로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와인통의 뚜껑을 보드 삼아 화살을 쏘았다가 나중에는 나무를 쓰러뜨려 커팅한 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때 쓰였던 나무 판이 후의 다트의 디자인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무렵부터 약 500여년의 시대를 다트는 영국의 군대와 함께 세계의 7개의 바다와 대륙을 떠돌며 진화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영국에 평화가 찾아 온 시점에서 무기로 사용하던 화살을 짧게 잘라, 활을 쓰지 않고 손으로 던지는 경기로 바뀌어 게임으로서 즐기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시대와 함께 표적으로 큰 나무를 잘라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건조된 표면에 몇 개의 방사상의 균열이 생겼는데 이것을 구역별 채점 방법으로 결정하면서 표적을 노리는 테크닉의 재미를 찾아내었고 지금의 경기방식과 흡사하게 바뀌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다트라는 게임이 보급되었지만 득점이 가지각색이었다가 1896년에 한 영국인에 의해 점수 구분을 붙이는 방법이 고안 되어 현재 보드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영국에서는 다트라는 게임이 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스포츠라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단번에 전국적으로 스포츠 게임으로서 퍼져 나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B.C 400년경에 옥외스포츠로서 시작되었던 당구는 영국기원설과 프랑스기원설이 있다. 영국은 포켓게임을 위주로 발전해 나갔고, 프랑스는 4구 및 3구와 같은 캐럼 게임을 발전시켰다. 당구가 유럽에서 아시아권으로 전파된 것은 1850년에 네덜란드인을 통해 일본 황실에 보급된 것이 아시아 최초이다. 우리나라에는 1910년 순종 때 일본인을 통해 창덕궁 동행각에 2대의 당구대가 설치되면서 한국 당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중국도 만주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일본군에 의해 당구를 접했고, 지금도 요령성 심양시에 위치한 황궁에는 그 당시 당구대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 일본 중국에서 최초로 당구를 접한 동호인은 전부 임금님이었으니 당구가 귀족 스포츠로 출발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에는 당구가 고급사교운동으로 인식되었지만, 자유당 정권을 거치면서 불량배들의 오락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당구인들의 노력으로 국제사회에서 당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당구는 1995년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에 88번째로 가입되었고, 1998년 IOC총회에서 올림픽에서 인정하는 종목이 되었다.
댄스스포츠란 한 쌍의 남녀가 함께 춤추는 것으로, 음악에 맞추어 신체활동을 함으로써 얻는 정신적 즐거움과 그에 따른 육체적 건강, 사교활동을 통한 예의범절을 익히는 건전한 스포츠다. 또한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여가활동이다. 무도회에서 추는 춤이라는 의미의 볼룸댄스를 말하며, 세계 각 나라에는 그 나라마다 민속무용이 있으나, 댄스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도법으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춤으로, 예술의 미적 가치를 창조하는 스포츠라고 정의할 수 있다. 댄스스포츠는 스포츠적 특성은 물론 무용과 음악 그리고 연극적 요소가 함께 접목된 것으로, 스포츠 예술적 틀을 갖춘 시간예술, 공간예술, 시각예술, 지각예술이 연계된 종합예술이다. 댄스스포츠(dance sports)란 용어는 1995년 IOC에 가입 승인을 취득하고 난 후에 국제 상위 기구들이 스포츠 경기적 성격을 띤 공통적인 명칭으로 사용하면서부터 국제 표준어가 되었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는 본래 민속무용, 궁중무용, 올드타임 댄스, 볼룸댄스라는 단어가 변화되어 사용된 것이고, 시대적ㆍ문화적 변천과정에 의해 그 시대의 예술적 잔재로 파생되어 중세의 사교를 목적으로 한 댄스가 성행하면서부터 그 실체와 내용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규정된 예술체계를 말한다. 오늘날의 댄스스포츠는 사교적 목적보다는 신체 단련을 위한 운동이라는 측면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으며, 생활체육의 한 분야로 대학 교양과목과 각 학교의 특별활동, 문화센터나 사회교육원 등에서 강좌로 채택되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빙상스케이트의 날 대신 바퀴를 붙인 스케이트로, 바퀴가 일자로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때, 비슷한 종류로서, 바퀴가 2열로 늘어선 롤러스케이트와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여러 가지 장점이 많은 인라인 스케이트만 남고 롤러스케이트는 거의 사라진 상황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던 때엔 ‘롤러블레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이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생산하는 회사의 상표명으로서 적절한 명칭이 아니다. 빙상스케이팅은 계절과 장소에 영향을 받는 데 반해 인라인스케이팅은 장소, 시간, 계절 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보급될 수 있는 영역이 크며 겨울에 빙상스케이팅을 즐기기에 어려운 점이 있는 나라들 즉, 얼음이 얼지 않는 남쪽 지방, 열대성 기후 국가에서 빙상스케이팅의 훌륭한 대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700년대 초여름에도빙상스케이팅을 즐기고 싶어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나무 조각에 실패를 박아 만든 것이 롤러스케이트와 인라인스케이팅의 원조 격이다. 지금은 운동용품뿐만 아니라 운송용으로도 사용될 만큼 대중적인 용구가 되었다. 동호인 및 클럽 수가 많이 증가하고 있는 데 반해 아직 인라인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 많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전주시무에타이협회 역사
무에타이는 타이의 전통 격투 스포츠로 1000년가량 이어진 전통 있는 무술이다. 그러므로 타이 복싱으로 불리기도 하며 타이의 고대무술 무어이보란이 현대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에타이는 크게 람무아이와 크라비크라봉으로 나뉜다. 람무아이는 맨손 격투술이며, 크라비크라봉은 ‘크라비’등의 무기를 사용한 기술이다. 그 중 우리에게 보편적인 것은 람무아이로, 단단한 신체 부위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때려 부수는 격투 방식이다. 타이 고고학자들의 말을 인용한 타이무술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무에타이는 이미 2,000년 전부터 존재하여 왔다고 한다. 이와 같은 무에타이는 전쟁 시의 무술로서 제 역할을 다했으나 평상시에는 도박이 가미된 격투술로 그 역할 또한 컸다. 그러다가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 동안 룰을 갖춘 스포츠로 자리를 잡게 된다. 즉, 1950년대 이후로는 복싱 글러브가 도입되었고 링에서 경기를 하였다. 현재 무에타이는 이종 격투기 선수라면 무조건 익혀야 하는 기술로 인정될 만큼 정평이 나 있는 격투기로 자리 잡았다. 단단한 신체 부위를 사용하는 무에타이의 특성상, 뼈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선수들은 정강이, 팔꿈치, 무릎 등을 혹독하게 단련하는데, 이 지나친 신체 혹사는 대부분의 무에타이 선수들의 조기 은퇴 요인 중 하나가 된다
전주시무에타이협회 임원현황
현재회장
송병용
전주시바둑협회 역사
바둑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중국에서 발생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요순창시설 : 바둑의 유래는 대부분 고대의 전설에 의존하는 형편이며, 사실`(史實)이 기록된 문헌도 드물다. 그러한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고대 중국의 요`(堯)·순`(舜) 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와 상균`(商均)을 깨우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다. 중국의 고전『박물지`(博物誌)』에 실린 ‘요조위기 단주선지`(堯造圍棋丹朱善之)’라는 문구에 따르면 기원전 2300년 전 요왕이 아들을 위해 바둑을 발명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설문`(說文)』에는 기원전 2200년경 순왕이 우매한 아들에게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중흥서`(中興書)』에도‘요순이교우자야`(堯舜以敎愚子也)’라는 글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내용 자체가 다분히 전설적인데다 구체적이지 못해서 이‘요순창시설’의 사실적 근거가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어리석은 아들’이라면 바둑을 배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모순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체관측설 : 농경`(農耕)사회였던 고대에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우주와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도구로 바둑이 발명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황하유역에는 해마다 홍수가 범람하여 선사시대 때부터 자연스럽게 천문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던 도구가 발전하여 오늘날의 바둑이 되었다는 설이 과학적인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바둑이란 흑돌과 백돌을 바둑판 위에 번갈아 두며‘집’을 많이 짓도록 경쟁하는 게임이다. 흑돌로 둘러싸인 A는 흑집이며, 백돌로 에워싸인 B는 백집이다. 참고로‘집’을 한자어로는 가`(家), 호`(戶), 목`(目)`(일본식), 자(子)`(중국식) 등으로 표현하며, 서양에서는 territory`(영토), point`(점)라 부른다. 흑백이 서로 많은 집을 지으려다 보면 경계선을둘러싼 분규가 일기 마련이며, 그것은 치열한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돌들이 접촉하는 과정에서 돌의 삶과 죽음이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수많은 격언과 교훈이 파생되고, 그래서 바둑은 흔히 인생에 비유되기도 한다.
전주시바둑협회 임원현황
김영순
전주시배구협회 역사
배구가 처음 창안된 때는 1895년으로, 미국 매사추세츠주 홀리오크시에 있는 YMCA 체육지도자 윌리엄. G. 모건이 처음 고안하였으며 운동량이 그다지 심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경기를 목표로 개발되었다. 1896년 스프링필드에서 최초의 공개 시합이 개최되었으며, 원래의 규칙은 5인제·21점제였으나 차츰 개량되어 1920년 무렵에는 6인제·15점제·로테이션제 등 현행 6인제 국제 규칙이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에 배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15년이었다. 이듬해 1916년에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세브란스병원 직원이 최초의 공식 시합을 가졌고, 같은 해 3월 YMCA의 반하트가 회원들에게 배구를 정식으로 지도하였다. 1917년 3월 30일 YMCA 체육관에서 기독청년회원과 서양인과의 정식 경기가 개최되었다. 그 뒤 1925년 10월 1일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조선배구대회가 경성 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정에서 첫 공인 경기로 열렸다. 1927년에는 배구의 기술발전을 위하여 조선 중앙 가톨릭청년회에서 극동올림픽위원인 F.H.브라운을 초청, 강습회를 갖기도 하였다. 1945년 11월 20일 조선배구협회가 발족되었고, 광복과 더불어 부활된 전국체육대회(광복경축종합체육대회) 때부터 배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55년 제1회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2위를 하였고, 1958년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6인제에 출전하여 남녀 모두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1959년 국제배구연맹의 공식회원국이 되었고, 1969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청소년배구대회에서 당시 세계 최강의 일본을 물리치고 남녀 모두 우승을 하였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는 여자팀이 동메달을 획득하였고,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녀팀 모두 2위를 차지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수준급 성적을 이어가고 있다.
전주시배구협회 임원현황
김영춘
전주시배드민턴협회 역사
배드민턴은 1820년 경, 인도의 봄베이 지방에서 성행했던 민속 경기인 푸나(Poona)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장교들이 이를 배워 본국으로 돌아와 체계를 잡았다고 여겨진다. 당시 영국에서는 글러스터시어주의 뷰 포드경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뷰 포드경이 거주하던 배드민턴이라는 지명을 따서 경기의 명칭으로 사용함으로써 오늘날의 배드민턴이 된 것이다. 초창기 배드민턴은 귀족계급의 게임으로 대단히 매너가 엄격하여 깃이 높은 셔츠에 저고리를 단정히 입고 실크 모자를 쓴 채 품위 있는 차림으로 게임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 격조 높은 품위가 현재에도 배드민턴 경기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엄격한 매너를 갖추도록 하고 있다. 그 후 1893년 영국배드민턴협회의 창립과 동시에 규칙이 제정되었고 1899년 배드민턴대회가 개최되어 덴마크, 스웨덴, 독일 등의 유럽 각국과 캐나다, 미국, 동남아시아, 중국, 한국 등으로 확산 보급되었다. 세계적인 경기대회로는 1939년 국제배드민턴연맹의 초대회장 조지 토머스 경이 기증한 토머스컵(THOMAS CUP)의 남자단체대회와 H.S 우버 여사가 기증한 우버 컵(UBER CUP)의 여자단체대회와 전영 선수권대회 등이 있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시범종목을 거쳐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외에도 세계의 각국에서 많은 오픈(OPEN)대회를 개최하여 수많은 경기가 연중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 배드민턴 경기가 보급된 것은 해방 후의 일이다. 그러나 당시의 배드민턴은 놀이의 성격을 띤 것으로서 1957년 비로서 대한배드민턴협회가 조직되면서 경기적 배드민턴이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62년에 배드민턴협회가 대한 체육회 가맹단체가 되었으며 그해 제43회 전국체육대회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후 각종국제 대회에서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중 1981년 혜성같이 나타난 우리나라의 황선애 선수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고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전 영국오픈 배드민턴선수권대회에서 개인단식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배드민턴을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또한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박주봉, 김문 수조는 남자복식, 황혜영, 정소영조는 여자복식 경기에서 금메달, 심은정, 길영 아조는 동메달, 여자단식의 방수현 선수는 은메달을 획득하여 명실상부한 배드민턴의 세계강국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혼합복식에서 이용대-이효정 조가 우승하며 그 위상을 드높였다. 생활체육 측면에서도 배드민턴이 차지하는 자리는 크다. 현재 전국 동호인이 수백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주시배드민턴협회 임원현황
김성기
전주시보디빌딩협회 역사
1949년 12월 4일 명동 시공관에서 개최 되었던 제1회 미스터코리아 선발대회는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최초의 보디빌딩 행사로서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앞선 일본보다 무려 6년이나 먼저 개최된 스포츠 행사였다. 요즈음과는 다르게 학생부, 일반부 구분도 없었으며, 체급의 나누어짐도 없이 일반부 대회만 있어 입상의 기회는 그만큼 적었다. 초대 미스터코리아로서는 YMCA 소속의 조순동 선수가 차지하였으며, 제2회 대회부터 제6회 대회까지는 6.25사변으로 대회를 치르지 못하고, 제7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던 곳인 전라남도 광주시 서중학교에서 1955년 12월 18일 개최되어 홍정식 선수가 미스터코리아로 선발되었다. 그 후 협회 사정으로 8회, 9회 경기가 치러지지 않다가 제10회 대회는 서울 동화극장에서 1958년 10월 14일 열려 현 대한 보디빌딩협회 김덕현 회장이 종합우승을 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21회 미스터코리아 선발대회를 치르면서 우리나라의 보디빌딩은 더욱 발전되어 갔다. 이 시기에 활약한 유명 보디빌더로서는 박국경, 김용운, 이창윤, 오점석, 장완수, 신정태, 김희선, 김상기, 유회식, 배기철, 김창남, 조판오, 홍영표, 정휘용 씨 등을 들 수 있다. 현재 이들은 보디빌딩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사명감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보디빌딩의 발전에 큰 역할을하고 있다. 그 후 한해도 빠짐없이 치러진 이행사는 어느종목보다도 역사와 뿌리가 깊고 전통있는 연중행사로 자리잡았으며, 동양권에서는 가장 먼저 보디빌딩을 보급한 선구자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전주시복싱협회 역사
고대 조각이나 벽화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복싱은 기원전 3000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제23회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처음으로 복싱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최초의 금메달 리스트는 Smyrne로 알려져 있다. 제41회부터 청소년부의 복싱이 시작되었고 왼손 복서인 Tisandros가 기원전 572~560에 열린 올림픽대회에서 4연속 우승을 하였다. 그 후 1892년 글러브를 끼고 1라운드는 3분으로 하고 휴식은 1분으로 하며 다운이 되어 10초 이내에 일어나지 못하면 상대편의 승리로 인정하는 Queens Berry의 규칙이 제정되었다. 1896년에 근대올림픽이 개최됨에 따라 세계 각국에서 복싱연맹이 결성되어 국제교류가 시작되었다. 1946년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mateur International Boxing Association:AIBA)가 영국 런던에서 발족하였고 현재 전 세계 나라에서 복싱이 행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복싱은 1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음 복싱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는 민족의 격동기라 할 수 있는 시기였으며 국운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각 방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다. 우리나라의 복싱이 어떠한 과정으로 성장해 왔으며, 그 결과 우리 국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 4단계, 즉 태동기(1912∼1935), 개척기(1936∼1944), 발전기(1945∼1960), 도약기(1961∼1955)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도약기 시기에는 특히 프로 복싱계의 황금기라 할 만큼 각 체급에서 세계의 정상을 쟁취하는 챔피언이 속출했다. 그들 챔피언은 매스컴과 국민들의 열광 속에 일약 스타로 탄생됨과 동시에 명성과 부를 함께 얻음으로써 복싱 발전을 크게 자극시켰다. 우리 나라에 복싱이 전래된 지 꼭 반세기만인 1966년 6월 25일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의 벤 베누티를 물리치고 WBA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함으로써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 정상 도전에 성공하였다. 이는 광복과 전란 이후 복싱인이 국민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었다. 프로 복싱계의 가장 신화적인 경기는 1977년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전이다. 홍수환 선수가 적지 파나마에서 카라스키야 선수를 맞아 4번 다운되고서도 다시 일어나 상대를 KO시키고 챔피언이 되었다. 이 경기에서 보여준 홍수환의 스포츠 정신은 국내의 많은 복서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각 체급 세계 챔피언 및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아마추어 경기에서 최강의 실력을 갖춘 우수한 선수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전주시복싱협회 임원현황
이경철
전주시볼링협회 역사
진자운동의 원리를 응용하여 볼을 굴림으로써 목표지점에 놓여있는 핀을 쓰러뜨리는 스포츠로, 무거운 공의 스핀을 적절히 조절하는 능력과 목표물에 정확히 공을 굴려 넣을 수 있는 동작과 스피드가 복합된 경기다. 볼링은 돌을 던지거나 굴려서 표적에 맞히려는 인간의 본능에서 발생된 것으로 보인다. BC 5,200년 무렵의 이집트 유적에서 돌로 된 핀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고대 볼링 용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 중세 유럽에서 종교적인 의식으로 승려나 교구민들이 나뭇조각 쓰러뜨리기를 했는데, 이것이 볼링의 원형이라고 알려져 있다.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가 M.루터가 현대와 같은 볼링 경기 규칙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17세기에는 아메리카대륙에 전해져 급속히 퍼졌다. 1895년 미국볼링협회가 발족하면서 전 세계로 보급되어, 현재 국제볼링연맹(FIQ)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가입되어 있다. 한국에 볼링이 도입된 것은 6·25 직후 미군을 통해서였으나, 1969년 8월 대한볼링협회가 창설되기 전까지는 그 활동이 미미했다. 협회 발족 후 볼링 인구가 늘어나면서 1981년 9월에는 대한체육회 산하단체로 정식 가입하였다. 그 이후 각종 세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동호인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전주시볼링협회 임원현황
이춘성
전주시빙상경기협회 역사
우리나라에 스케이트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구미 여러 나라에서 각종 국제대회가 개최되고 각종 올림픽대회가 개최되어지기 시작한 19세기 이후이다. 그 당시에는 스케이트를 구입하기 힘들었으므로 목판에 칼이나 철사 등을 붙이고 그 목판을 신 밑에 끈으로 달아서 스케이트의 한 형태로 놀이를 즐겼다.이것은 스케이트가 아니라 빙상의 유희 및 오락의 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후 1912년 경성일보사가 용산부근에 빙활장을 만들고 무료로 개방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스케이트장이다. 또한 1915년에는 중국의 빙상단을 초청하여 의주농업학교 부근의 경빙장에서 스케이트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빙상 경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케이트가 국민에게 정상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이후라 할 수 있다. 1921년 12월에 조선체육협회가 명동부근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개방함으로써 일반인의 스케이트에 대한 관심은 점차적으로 고조되어 갔으며 스케이트의 흥미 및 기술의 보급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전주시빙상경기협회 임원현황
최기철
전주시산악협회 역사
등산 도중 나타나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또는 주로 암벽으로 이루 어진 험난한 산의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던 암벽등반은 200여년 의 현대등반의 역사를 거치면서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독립적인 등산의 장 르로 발전하여 왔으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점점 세분화, 전문화 되 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전문화되어가는 현대 암벽등반의 과정 속에서 탄생한 인공암벽 이 라는 새로운 등반기구의 등장은 암벽등반의 세계에 일대 혁신적인 발전의 전환점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196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자유등반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암벽등반을 더욱 잘하기 위한 트레이닝을 목적으로 인공암벽이 만들어 졌으나 세계암벽대회 개최 대상자가 자연 암벽에서 자연암벽에서 인공암벽으로 일대 전환을 하면서 세계 곳곳에 대규모 실외의 인공암벽과 실내 인공암벽이 세워짐에 따라 인공암벽 등반 은 우선 자연 암벽까지 가야하는 시간과 경비를 절감 할 수 있고 난이도를 자유자제로 바꿀 수 있으며 안전도 또한 자연암벽등반보다 뛰어나 계절과 기후에 관계없이 전 문 클라이머는 물론 일반 초보자들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어 훈련을 목적으로 또는 그 자체가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스포츠의 형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과 행위를 기존의 암벽등반과 구별하여 스포츠클라이밍 이라 부를 수 있는데 유럽, 특히 프랑스 등에서는 각 학교의 체육관, 시도의 축 구장, 야구장, 아파트외벽, 교각 등 생활주변 곳곳에 인공암벽이 세워져 남녀노소 누구나 가족, 이웃, 직장동료 심지어 유치원 학생과 선생님들까지도 국민 생활 체 육의 일환으로 이 스포츠 클라이밍을 즐기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도 88년도부터 인공암벽이 세워지기 시작하여 현재 약 100 여곳에 인공암벽이 세워져 이곳들을 중심으로 한 암벽등반의 활동이 활발하게 보급, 전개되고 있다.
전주시산악협회 임원현황
엄정용
전주시생활체조협회 역사
생활체조란 생활 속에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리듬감 있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통하여 즐거움과 건강을 증진시키는 신체활동이다. 체조의 역사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인류가 시작되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뛰고, 걷고, 달리고, 던지는 등의 모든 활동들을 체조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고대에는 각 나라의 역사 속에서 각기 독특한 형식으로 체조가 존재하였으며, 근대에 들어서면서는 고대에서 행해지던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체조가 본격적으로 연구되어, 합리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독일의 바제도우, 시몬, 구츠무츠, 짤쯔만, 얀 등이 체조에 관한 다각적인 연구를 행하였으며, 스웨덴의 링, 덴마크의 나하데칼, 닐스북 등이 근대체조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들면서 형식적이고 딱딱한 형식의 체조에서 탈피하여 율동적이며, 즐거운 체조가 요구됨에 따라, 리듬체조, 신체조, 에어로빅, 재즈체조 등 다양한 형태로 발달이 되어왔다. 이 같은 체조의 역사로 볼 때, 생활체조라 함은 생활 속에서 손쉽게 건강을 위하고 즐겁고 쉽게 할 수 있는 제형태의 율동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통용되고 있는 에어로빅댄스는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또 다른 형태의 생활체조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각종 민속체조, 댄스스포츠, 재즈체조, 요가체조, 명상체조 등등 다양한 형태로 생활 속에서 응용될 수 있는 모든 움직임이 생활체조 속에 포함되어진다.
전주시생활체조협회 임원현황
한양환
전주시정구협회 역사
테니스와 흡사한 스포츠로, 연질 고무 볼을 이용하여 쉽게 테니스를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 개발된 경기이다. 테니스를 경식 정구로, 정구를 연식 정구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정한 규격 경기장 내에서 네트를 경계로 원 바운드 또는 노 바운드로 고무 볼을 서로 공격하여 득점과 실점으로 승패를 겨루는 경기이다. 남녀노소 모두가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운동으로, 건강 증진과 레크리에이션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운동이다. 1878년 영국인 리랜드가 일본에 테니스를 소개하였는데 1890년 도쿄 교육대학에서 이것을 변형하여 정구 특유의 부드러운 고무공을 개발, 창안하게 되었다. 1924년에 일본정구협회가 설립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45년 조선정구협회가 정식으로 결성되었으며, 1955년에 경식과 연식정구협회가 분리되었다. 1956년에는 아시안 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75년부터 4년마다 행해지는 세계선수권대회로 확대되어 개최되고 있다.
전주시정구협회 임원현황
오세일
전주시수영연맹협회 역사
인간이 수영을 하게 된 동기는 생활 수단(고기잡이, 교통수단, 호신)과 종교 의식, 질병 치료로 생각된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9천여 년 전의 것으로 추측되는 리비아 동굴의 수영하는 사람 모습이 새겨진 벽화가 최초이고, 의도적으로 수영을 하기 시작한 것은 페르시아에서의 소년들의 신체 단련과 군사 훈련, 아시리아에서의 군사훈련이며, 중세에 와서는 수영이 군인 훈련의 필수 과목으로 행하여졌다. 근세 초기에는 이탈리아의 베르나르디, 독일의 구츠무츠, 푸엘 등에 의해 국민 보건, 교육, 여가 활동으로 수영이 바람직하다고 인정되어 권장되었다. 1837년에 영국 런던에서 처음으로 수영이 경영으로 거행되었으며, 영법은 평영과 횡영이었다. 이와 같은 영법은 지금의 자유형, 배영, 접영으로 개량·발전되었다. 우리나라는 1898년 무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수영을 가르쳤고, 1929년 제1회 전국수영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946년에는 조선수상경기연맹이 창립되었다. 그리고 1952년에는 국제아마추어수상연맹에 가입하였으며, 지금은 전 국민의 스포츠로 널리 보급되었다. 아시아경기대회 등에서 조오련, 최윤희, 최윤정 등이 좋은 성적을 냈으나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등 국제 경기에서는 체격 조건이 뛰어난 서양선수들이 독식하였다. 그러나 최근 동양 선수들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으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박태환 선수가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우리나라 수영 역사에서 큰 금자탑을 세운 쾌거였다.
전주시수영연맹 임원현황
이종조
전주시수중핀수영협회 역사
스쿠버 다이빙이란 표면공기 공급 장치와는 달리 육상 또는 수면으로부터 공기를 공급 받지 않은 상태로 (다이버는)압축 공기통이나 호흡기체를 압축해 담은 용기를 착용하고 수중에서 자유로이 호흡하면서 이동하며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활동을 스쿠버 다이빙(Self Contained Underwater Breathing Apparatus)이라 한다. 스쿠버의 종류를 살펴보면 스포츠 다이버들이 주로 사용하는 개방회로 (Open Circuit)와 과학조사와 군사적 목적에 주로 사용되는 반폐쇄회로 (Semi-closed circuit), 군사적 목적에 주로 사용되는 폐쇄회로(Closed circuit)가 있다. 1943년 프랑스의 자끄 이브 꾸스또(Jacques-Yves Cousteau)와 에밀가냥(Emile gagnan)에 의해 발명된 스쿠버 장비는 표면 공기장치보다 착용이 간편하고 안전성이 우수하여 일반인에게도 각광받는 스포츠로 발전하게 되었다. 스쿠버 다이빙은 단순한 해저관광에서 상업적,군사적,과학적 목적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 범위가 넓고, 스쿠버 다이빙 자체가 목적일 수 있으나 수중촬영이나 수색 인양과 같이 스쿠버 다이빙이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다. 활동 분야로는 야간잠수, 흐린물잠수, 심해잠수, 고도잠수, 수중방향찾기, 드라이슈트 다이빙, 나이트록스 다이빙, 동굴잠수, 얼음밑잠수, 과학군사잠수, 수중사진, 수중비디오 촬영 등 다양한 분야가 있다.
전주시수중핀수영협회 임원현황
이정국
전주시스쿼시연맹 역사
일반 라켓 종목이 네트에 의해 구분된 코트에서 경기가 펼쳐지는 것과 달리,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코트에서 라켓으로 벽에 볼을 튀기고 이를 받아 쳐내는 경기이다. 운동 효과가 커서 바쁜 도시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스포츠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며 두뇌 플레이가 요구되고 심리적 안정감도 필요한 경기이다. 강한 체력과 빠른 스피드, 여러 가지 기술도 요구되는 스포츠이다. ‘스쿼시(squash)’는‘구석에 밀어 넣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본래 스쿼시는 영국 런던 근교의 한 감옥에서 죄수들이 수형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야자열매로 교도소 벽을 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오늘날과 같은 스포츠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830년경에 영국의 해로우 고등학교에서 지금과 비슷한 라켓을 고안해내면서부터이다. 1차 세계 대전 후부터 본격적인 스포츠로 각광받기 시작하였고 프로화, 국제화되고 리그전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23년 경기규칙이 확립되면서부터 세계적인 경기로 자리 잡았다. 전 세계 수많은 인구가 스쿼시를 즐기고 있으며 그 수는 매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스쿼시가 강세를 보이는 지역은 미국, 캐나다, 이집트, 영국, 호주, 뉴질랜드 파키스탄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그러나 최근 20년간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중동,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아르헨티나, 한국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왔다.
전주시스쿼시연맹 임원현황
서소영
전주시스키협회 역사
스키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자연스럽게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스키는 지금부터 4~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스키의 용도는 주로 교통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단순히 이동 수단으로서의 목적도 있으나 이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고 전쟁을 수행했으므로 설원의 나라에서는 제2의 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스키는 오늘날 볼 수 있는 스키의 기술들을 적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즉, 스키를 발에 단단히 고정할 수 없었으므로 점프나 턴과 같은 기술을 구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키가 근대적인 스포츠로 발달하게 된 데에는 스키를 얼마나 단단하게 신발과 결속할 수 있느냐, 그리고 바인딩 기술을 적용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용기를 얻어 쇠로 된 바인딩을 고안하였고, 수년에 걸쳐 독자적으로 스키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알파인스키기술이란 책도 저술하는 등 알파인스키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1904년 스위스와 1905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스키 클럽이 생겼는데 1911년에 차르스키의 제자였던 레루(T.Lerch) 장군이 일본에 스키를 전했다. 근대 스키를 정립한 오스트리아의 슈나이더(H.Schneoder)는 알파인기술을 체계화 하였으며 알파인이란 이름도 그가 태어난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늘날 알파인 스키기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국제스키 경기는 1924년 국제스키연맹(Federation Internationalede Ski; FIS)이 창설된 후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프랑스 샤모니에서 열린 제1회 동계올림픽경기에 크로스컨트리 스키경기와 점프스키 경기가 실시되었다. 1936년 독일에서 개최된 제4회 올림픽대회에서는 활강경기와 회전경기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실시되고 있다.
전주시스키협회 임원현황
김대식
전주시씨름협회 역사
씨름은 우리나라 고유의 투기 스포츠로 샅바를 맨 상태에서 두 사람이 겨뤄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경기다. 손과 발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기기 위한 관건이다. 씨름은 인류의 탄생과 때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자기의 보호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또한 종족 보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적이나 천적과 투쟁하였고, 소극적인 방어만으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격 행위가 필요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싸움의 기술이 체계화되어 씨름과 같은 투기 종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단오절, 백중날, 한가위 등의 명절에 민속 경기가 자주 열렸는데, 씨름은 이와 같은 명절에 강변 모래사장이나 시골 장터, 마을 한가운데에서 열리던 경기였다. 당시 경기에서 승자에게는 부상으로 황소가 주어져, 우승자는 황소를 타고 마을을 돌며 천하장사임을 과시하여 축제 분위기의 피날레를 장식하기도 했다. 특히 조선시대 서울 남산에 있는 산단 앞 잔디밭에서 벌어진 단옷날의 씨름은 볼 만했다고 한다. 현대의 정식 씨름경기는 1912년, 유각권 구락부의 주최로 단성사에서 최초로 열린 이후, 암흑의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의 놀이로 끊임없는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왔다. 최근에는 프로 씨름이 등장하면서 더욱 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전주시씨름협회 임원현황
전주시야구소프트볼협회 역사
야구의 기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13세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크리켓(cricket)이 라운더즈(Rounders)가 되고 이것이 발달되어 베이스볼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영국에서는 19세기 전반에 배트와 볼을 사용하는놀이가 성행, 포코너즈(four corners)라든가, 피더(feeder), 라운더즈 등으로 불리었다. 이것을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민하면서 미국 독립전쟁(1775년) 이전에 동부 해안지방에서 자주 경기가 시행되다가, 19세기 중엽에는 미국 각지에 보급, 발달되었다. 한국에 야구가 들어온 것은 1905년 미국인 선교사 P.L. 길레트(한국이름;吉禮泰)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지도한 것이 그 시초이다. 1923년 5월 23일 윤치영(尹致暎), 이원용(굃源容), 허성(許城), 이석찬(굃錫贊), 유용탁(괤容鐸) 등에 의해 조선야구협회가 창설되었고, 1930년 9월에는 야구심판협회가 결성되어 야구계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이영민은 일본에 가서 크게 활약하기도 하였다. 국내 야구계는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일시 정지되기도 하였으나, 그 뒤 1945년 10월 조선야구협회가 재조직되었으며, 1946년 9월 휘문, 경신, 배재, 중앙 등의 4개 팀이 서울운동장에서 리그 부활전을 열었다. 한국은 1954년 11월 국제야구연맹에 정식 가입하였고, 대표팀의 최초 결성은 195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였다. 그 뒤 한국 야구는 고교 야구의 활성화를 바탕으로 저변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국제적으로도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 상위권으로 올라섰고, 1982년 프로야구의 탄생을 계기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저변 확대에 힘입어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미국, 일본, 쿠바 등의 강팀을 물리치며 9전 전승으로 우승,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전주시야구소프트볼협회 임원현황
서형수
전주시역도연맹 역사
무거운 원판을 심봉 양쪽에 끼우고 이를 들어 올리는 경기를 말하며, 들어 올린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경쟁하는 스포츠다. 경쟁 방법은 들어 올리는 방법에 따라 나뉘며, 성별, 체급별로 경기를 치른다. 역도와 비슷한 형태의 경기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돌과 같은 것들을 이용하여 경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세 독일에서는 무거운 돌을 던지는 힘자랑 형식의 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힘겨루기 차원의 경기가 제대로 형식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부터다. 역도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독일의 구츠무츠나 얀 등 체조 연구가들에 의해서다. 또한 얀의 제자 아이젤렌에 의하여 덤벨 운동의 지도서가 만들어졌다. 1869년 제1회 올림픽대회에서는 역도가 체조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졌는데 체급도 없었으며 종목이 지금과 달랐다. 1920년 제7회 올림픽대회부터 비로소 독립된 체급 경기로 인정을 받았으며,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올림픽부터는 양손에 의한 추상, 인상, 용상의 세 종목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추상 종목은 1973년부터 폐지되었다. 현재와 같은 역도가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28년‘역기’라는 칭호를 갖게 된 후다. 1936년에는 조선역기연맹이 조직되었으며, 1946년 해방 후 조선역도연맹이 발족되었고, 다음해인 1947년에 우리나라 역도 사상 최초로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역도와 비슷한 형태의 경기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돌과 같은 것들을 이용하여 경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세 독일에서는 무거운 돌을 던지는 힘자랑 형식의 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힘겨루기 차원의 경기가 제대로 형식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부터다. 역도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독일의 구츠무츠나 얀 등 체조 연구가들에 의해서다. 또한 얀의 제자 아이젤렌에 의하여 덤벨 운동의 지도서가 만들어졌다. 1869년 제1회 올림픽대회에서는 역도가 체조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졌는데 체급도 없었으며 종목이 지금과 달랐다. 1920년 제7회 올림픽대회부터 비로소 독립된 체급 경기로 인정을 받았으며,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올림픽부터는 양손에 의한 추상, 인상, 용상의 세 종목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추상 종목은 1973년부터 폐지되었다. 현재와 같은 역도가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것은 1928년 '역기'라는 칭호를 갖게 된 후다. 1936년에는 조선역기연맹이 조직되었으며, 1946년 해방 후 조선역도연맹이 발족되었고, 다음해인 1947년에 우리나라 역도 사상 최초로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전주시역도연맹 임원현황
김종열
전주시요가협회 역사
요가는 명상과 호흡, 스트레칭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심신 수련 방법을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yuj’(결합하다)에서 시작해서 ‘yoga’가 되었으며, 요가의 모든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마음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가는 맺음을 말하며 음역하면 유가가 되고 의역하면 ‘상응한다’는 뜻이 된다. Patanjali가 지은『요가 수트라(yoga sutra)』의 제1장 2절에서는 ‘요가란 마음의 작용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조절하고 마음의 움직임을 억제하여 인간 본래의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상태를 요가라고 한다. 요가는 종교가 아니고, 마음ㆍ몸ㆍ정신의 융화와 경험의 방법론이다. 요가는 정신적인 도구상자이자 육체적인 건강과 안녕이다.
전주시요가협회 임원현황
최성순
전주시우슈협회 역사
우슈는 중국 고유 전통 무술의 하나로 도수(徒手)와 병기술로 기술적 내용을 갖추고 있다. 우슈는‘무술(武術)’의 중국어 발음으로서, 6세기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達磨) 선사가 고대 인도의 무술을 응용해 소림사(少林寺)에서 오랜 기간 참선하며 계승, 발전시켜 불가(佛家)에서 내공을 쌓고 체력을 다지는 민간 무술로 전승되었다. 우슈는 현대적 의미의 스포츠로서 ‘경기 우슈’를 말하는 것이며 종목은 투로와 산수로 나뉘는데, 투로는 중국 북방무술이라 할 수 있는 장권(長拳)과 남방무술이라 할 수 있는 남권(南拳), 양생술인 태극권(太極拳)의 권법 부분과 단병기인 도술(刀術), 검술(劍術)과 장병기인 곤술(棍術), 창술(槍術)의 무기술 부분의 표연 경기를 말한다. 산수는 동급 체급 선수 간의 자유대련으로 승부를 겨루는 종목이다. 우리나라에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소개되었는데‘18기’라는 이름 등으로 불리었으며 1989년 대한우슈협회가 발족되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때 정식종목으로 지정된 우슈는 태극권(太極拳), 남권(南拳), 장권(長拳)으로 나누어 남녀별로 3종목씩 모두 6종목이 치러졌으며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는 산수 경기가 추가되었다. 국내에서는 1997년 경남 전국체전에서 투로(套路 ․ taolu:표연)종목과 2002년 제주 전국체전에서 산타(散打 · sanshou:대련)종목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각종 국제 및 국내경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전주시우슈협회 임원현황
김정환
전주시유도회
일본에서 체계를 잡은 유도는 조선 고종 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고 1906년 명동에 세운 ‘우치다 도장’이 최초의 유도 도장으로 여겨진다. 조선유도연맹은 1948년 10월 28일 정식으로 창설하였으며, 1950년 11월 KUA(Korea Judo Association:대한유도회)로 개칭하였다. 1955년 11월 30일 KSC(Korea Sports Council:대한체육회)에 가맹하였으며, 1956년 5월 IJF(International Judo Federation:국제유도연맹)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5월 JUA(Judo Union Asia:아시아유도연맹)에 가입하였다. 주요 국제대회에서의 전적을 보면,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는 안병근(安炳根)·하형주(河亨柱)가 금메달을,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에서는 김재엽과 이경근이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95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는 종합 2위를 차지함으로써 사상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한편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여자부에서 김미정이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후로 계속된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에 많은 메달을 안겨주는 효자 종목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세계 최강의 실력을 갖춘 나라로 군림하고 있다.
전주시유도회 임원현황
이영섭
전주시육성연맹 역사
육상은 우리 인간의 모든 기능을 스포츠화한 가장 오래된 경기다. 더구나 육상은 인간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그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가? 얼마나 멀리 또 높이 뛰는가? 얼마나 멀리던지는가? 속도, 순발력, 힘, 지구력 등 인간의 모든 기능, 능력을 재고 서로 겨루는 것이 육상이다. 그래서 상대도 있고 기록도 있지만 한계에 도전하기에 육상은 던지기와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며, 인간의 기본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어느 스포츠보다 기본적이고 원초적 경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올림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올림픽의 중심 경기로 인식되어 있다. 육상은 크게 달리기, 뜀뛰기(도약), 던지기(투척)로 나눌 수 있으며, 유일한 단체종목인 계주(릴레이)와 여러 종목을 함께 하는 혼성경기로 남자는 10종, 여자는 7종으로 한다. 도로경기는 경보와 마라톤이 있으나 경보는 트랙에서도 실시한다. 1896년 제1회 올림픽대회에서 12개 종목의 남자 육상이 오늘날 이렇게 늘어난 것이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에서는 모두 42개 종목에 걸쳐 실시되었다. 달리기 14개, 허들 5개, 경보 2개, 계주(릴레이) 4개, 마라톤 2개, 높이뛰기 2개, 멀리뛰기 2개, 세단뛰기 1개, 장대높이뛰기 1개, 포환던지기 2개, 원반던지기 2개, 해머던지기 1개 창던지기 2개, 10종경기 1개, 7종경기 1개로 모두 42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었다. 그 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43개 종목으로 남자가 24종목, 여자가 19종목,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44개 종목으로 늘어났다. 신체적 구조와 체력적 요소로 인하여 남자만하던 종목을 여자가 하기 때문에 종목의 수가 늘어나는 추세이며, 얼마가지 않아 남·여 종목이 동일해 질 것으로 본다.
전주시육상연맹 임원현황
박영근
전주시자전거연맹 역사
사람의 힘으로 자전거를 움직여 속도 경쟁을 하는 경기를 말한다. 인류가 바퀴를 이용하여 생활에 사용한 것은 기원전부터이나 자전거의 형태가 나타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였다. 1790년, 자전거의 원형을 최초로 고안해낸 사람은 프랑스의 콩트 드 시브락 백작으로 그는 목재 수레바퀴와 두 개의 수직 자루를 만들고, 이것을 횡목으로 연결하여 자전거 형태를 만들었다. 이때의 2륜차는‘빨리 달릴 수 있는 기계-셀레리페르(Celerifere)’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1818년 독일의 칼 바론 폰 드라이스가 발명한 자전거(Draise, 드라이제)도 현재의 자전거와는 거리가 멀지만, 최고 속도 시속 15km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839년 스코틀랜드의 맥밀란이 자전거 동력장치인 페달과 크랭크를 개발하였다. 1885년 영국의 제임스 스탈레이가 앞뒤 바퀴의 크기가 똑같고 체인 구동식인 지금의 형태에 가까운 현대형 자전거를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자전거는 실용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교통수단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자전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 자전거가 언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는 상태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생산되어 점차적으로 늘어난 자전거는 1960~1970년 사이에는 실용적인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는 경기 및 레저용 등으로 다양화 되고 있다
전주시자전거연맹 임원현황
김학례
전주시족구협회 역사
한국에서 생겨난 유일한 구기 종목으로, 두 팀 간에 네트를 두고 머리와 발을 이용하여 상대 팀으로 공을 넘겨 승부를 겨루는 종목이다. 삼국시대부터 족구의 원형이 되는 형태의 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 공군 조종사들이 현대적인 규칙을 이용하여 즐기면서 ‘족구’ 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전군으로 확대 보급되고 전역자들이 모여 족구를 즐기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90년 4월 대한족구협회(국민생활체육 전국 족구 연합회)가 창립되어 경기 규칙 및 대회 방식이 체계화되었고 족구는 전신 운동으로서 좁은 공간에서도 별다른 장비나 도구없이 아주 간편한 옷차림에 공 하나만 있으면 재미도 있고 충분한 운동효과를 얻을 수 있어 특히 시간을 따로 내기 어려운 현대 직장인의 심신수련에 활력을 불어넣는 좋은 운동이다. 더욱이 족구는 다른 종목과 달리 규칙이 간단하기 때문에 쉽게 배울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대중 스포츠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전주시족구협회 임원현황
이춘관
전주시주짓수협회 역사
일본의 전통 무예인 유술(柔術)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주짓수는 유럽을 중심으로 전파된 유러피언 주짓수와 브라질 전통 격투기인 발리 투두와 결합한 브라질리언 주짓수로 나뉜다. 메치기, 유리한 포지션을 선점하여 팔다리 관절 꺾기, 목 조르기 등의 기술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실전 격투의 성향이 강하다. 유도복과 유사한 경기복을 입고 경기를 하며 화이트, 블루, 퍼플, 브라운, 블랙 벨트 순으로 승급을 한다.
전주시주짓수협회 임원현황
최인경
전주시줄넘기협회 역사
줄넘기는 원래 장애물을 뛰어넘는 도약의 즐거움과 줄이라는 생활도구가 어우러져 자연적으로 발생한 놀이다. 음악줄넘기는 리듬줄넘기라고도 불리며, 줄넘기의 원점으로 돌아가 음악에 맞추어 즐겁게 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창작과 완성의 즐거움이 있는 운동이다. 예로부터 줄넘기 운동은 전승적인 노래와 함께 집단의 놀이로, 아이들에게 보급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현재 하고 있는 줄넘기의 대부분은 목적으로서의 운동에서 수단으로서의 운동으로 바뀌어 줄넘기가 곧 체력 조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돼 온 실정이다. 학교체육에 있어서도 체육 조회, 수업 전, 중간운동 등에 폭넓게 취급되어 체력을 높이는 운동으로 빠질 수 없는 것이 줄넘기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아이들에게 이어져 온 전승적`(傳承的)인 줄넘기는 노래에 맞춰서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인원수를 바꾸거나 여러 장소를 돌거나 하며 실로 변화와 창조성이 가득 찬 즐거운 줄넘기였다. 결코 아이들은 체력 조성을 목적으로 뛰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줄넘기 자체를 좋아해 뛸 뿐이었다. 여기에 줄넘기의 원점`(原點)이 있고 본래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놀이의 원점에 목표를 두고 일본에서는 8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 들어 새로운 줄넘기 운동인 ‘음악줄넘기’를 제창하고 학교체육과 사회체육의 일환으로 권장하고 있다.
전주시줄넘기협회 임원현황
서길종
전주시축구협회 역사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축구와 유사한 경기를 즐겨온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공차기 놀이가 있었는데 그 명칭이‘축국(蹴鞠)’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 놀이를 했는데‘농주(弄珠, 둥근 놀이기구)’를 가지고 놀다가 옷고름이 찢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에 상륙한 영국 군함‘플라잉 피쉬(Flying Fish)’호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식 축구의 보급은 1904년 서울의 관립(官立) 외국어학교에서 체육 과목의 하나로서 채택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축구 경기는 1906년 3월에 서울 삼선평(오늘의 삼선교 부근)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시합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하에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1921년 제1회 전(全) 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1928년 5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조직인‘조선심판협회’(회장 신기준)가 창립되었다. 이어 5년 뒤인 1933년 9월 19일‘조선축구협회’(회장 박승빈)가 창립됨으로써 한국에서 정식으로 축구가 조직화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청량제였고 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싹이었다. 일제 말기 강제로 해산 되었던 조선축구협회는 해방과 함께 1948년 9월 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다. 같은 해 FIFA(국제축구연맹)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AFC(아시아 축구연맹)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처음 세계무대에 발을 내딛은 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최초로 진출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한국 축구는 1956년 제1회, 1960년 제2회 아시안컵에서 연속으로 우승함으로써 아시아 축구 챔피언으로서의 기세를 드높였다. 이어 1960년대 이후 메르데카컵, 킹스컵, 아시안게임,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 등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각종 축구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컵을 차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축구 최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계 무대에서의 도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우리나라 축구는 2002년 일본과 함께‘한국-일본 월드컵 대회’를 개최한 바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축구가 세계적 수준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국가 대표팀들을 누르고 4위 성적을 올리는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전주시축구협회 임원현황
이영국
전주시컬링경기연맹 역사
빙판 위에 스톤을 미끄러뜨려 표적에 가까이 정지시키도록 하는 경기로 각각 임무를 맡고 있는 선수가 힘을 합해 완성하는 동계스포츠이다. 컬링은 스코틀랜드에서 16세기 이전부터 시작된 얼음 위에서 행하는 스포츠로서 영국 및 영국 식민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스포츠 종목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캐나다에서는 컬링이 아이스하키와 더불어 국민적 스포츠로서 각광받고 있으며, 미국 및 유럽 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일본에서도 남녀노소를 불문한 생활스포츠로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 또한 19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실시된 이후 급격히 컬링 인구가 증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94년 대한컬링경기연맹이 창설되고 그해 4월 세계연맹에 가입하였으며 매년 강습회와 전국 대회를 개최하여 컬링 보급에 힘쓰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2001년 아시아태평양컬링선수권대회에서 여자팀이 우승, 2002년 아시아태평양 컬링선수권대회에서 남자팀 우승, 여자팀 준우승, 2004년 세계주니어컬링선수권대회에서는 남자팀이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고, 2007년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남자팀 금메달, 여자팀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의 성과를 얻으며 메달 효자 종목으로 부상하고 있다. 컬링은 중세 후반 스코틀랜드에서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41년 2월, 빙판 위에서 돌을 사용해 경기를 벌이는 대회가 렌프루셔 패이슬리 애비에서 벌어졌던 사실에 대한 기록이 현재까지 알려진 컬링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다. 1565년에는 대 피터르 브뤼헐이 컬링을 즐기는 농부들의 모습을 그린 두 점의 작품을 남겼다. 당시에는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 저지대 국가들 간에 교역 및 문화 교류가 활발했으며, 이는 컬링뿐만 아니라 골프의 초기 역사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컬링 스톤은 스코틀랜드 던블레인(Dunblane)의 오래된 호수가 마르면서 발견된 것이다. 여기에는 스톤이 만들어진 연도로 추정되는 1511과 1551이라는 숫자가 두 개의 스톤에 각각 새겨져 있었으며, 이는 16세기 초에 이미 컬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3] 킬시스 컬링 클럽에 의하면 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컬링 클럽이다. 이 클럽은 1716년 공식 창설되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4] 이 클럽은 또한 보를 건설해 얕은 호수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콜지움에 있는 이 클럽 소유의 옛 컬링용 호수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컬링 전용 호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호수는 따뜻해진 겨울 날씨로 인해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컬링이 매우 번성하였다. 세계 컬링 연맹은 스코틀랜드 퍼스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그 모체도 스코틀랜드의 컬링 협회였던 로얄 칼레도니안 컬링 클럽이다. 오늘날 컬링이 가장 널리 정착된 나라는 캐나다이며, 이곳 또한 과거 스코틀랜드 출신 이주민들이 많았던 지역이다. 로얄 몬트리얼 컬링 클럽(The Royal Montreal Curling Club)은 1807년 캐나다에 설립된 클럽으로 북미 지역에 현존하는 스포츠 클럽들 중 가장 오래된 클럽이기도 하다.[7] 미국 최초의 컬링 클럽은 1830년 설립되었으며, 19세기 말에는 스위스와 스웨덴에도 스코틀랜드 출신자들에 의해 컬링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컬링 챔피언십은 1959년 스코틀랜드 포커크와 에든버러에서 열렸던 스카치 컵이었으며, 남자 경기만 존재했다. 이 대회에서는 어니 리차드슨이 스킵(주장)이었던 캐나다 팀이 우승했다. 미국 최초의 컬링 클럽은 1830년 디트로이트에서 30마일 떨어진 미시간 주 오처드 레이크에 설립된 ‘오처드 레이크 컬링 클럽’(Orchard Lake Curling Club)이었다. 이 클럽에서는 히코리 블록을 스톤으로 사용했다. 1840년에는 ‘디트로이트 컬링 클럽’(Detroit Curling Club)이 시작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슬 클럽’(Thistle Club)이라는 클럽도 설립되었으며, 이 시기에 디트로이트강에서 겨울이 되면 컬링 경기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클럽들은 훗날 ‘그래나이트 클럽’(Granite Club)이 되었으며, 1885년에는 오늘날의 디트로이트 컬링 클럽이 설립되었다.
전주시컬링경기연맹 임원현황
한종희
전주시킥복싱협회 역사
킥복싱은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1964년 9월 당시 대한 태권도협회 오도관 전남 본관장인 구판홍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태권도에 대한 지도보급 과정에서 불합리한 점을 절감하고 기술적으로 가장 강한 무술을 만들고자 태권도, 복싱, 유도, 레슬링 등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절충하여 치고, 차고, 던지고, 꺾고, 조르는 종합 무술로 체계화하였으며 거기에다 화랑도 5계정신과 파사현정, 억강부약 등의 무도 정신을 접목시켜서, '킹투기'라는 무술을 독창적으로 창안하게 된 것이다. 주먹, 발, 팔꿈치, 무릎을 사용하여 상대편을 공격하는 태국 특유의 변형 권투를 말한다. 태국식 복싱에서 위험한 기술을 많이 제한하여 규칙을 바꾸었다. 그러므로 위험도가 많이 낮아졌다고는 하나, 다리 기술 · 권법 · 유도 · 당수[空手] · 박치기· 팔꿈치로 치기 등의 공격법으로 싸우는 특수한 복싱이며, 쇼적(的)인 요소 또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1963년 일본의 흥행사가 타이식 복서를 일본에 불러들여 흥행을 하였는데, 다리 기술을 많이 쓴다고 하여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경기는 복싱과 같은 링에서 행하여지는 스포츠 활동이다.
전주시킥복싱협회 임원현황
윤진
전주시탁구협회 역사
탁구는 그 역사나 기원이 정확하지 않은데, 중세 이탈리아의 ‘루식 필라리스’라는 놀이에서 변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15~16세기경 프랑스 궁전에서 행해진‘라파움(Lapaum)’이란 놀이가 변하여 탁구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 명칭도 일정하지 않아서 고시마, 프림프림, 와프와프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인도 등 영국 식민지에 살던 영국인들이 테니스에서 힌트를 얻어 더위를 피하여 실내에서 놀 수 있는 놀이로 변형시켰다는 것이 통설이다. 우리나라에 탁구가 도입된 것은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1924년 경성일일 신문사가 제1회 탁구 경기대회를 개최하면서 급격한 보급이 시작되었으며 1926년 동 신문사가 주최한 제2회 대회에는 300여 명의 남녀 선수가 참가하는 성황을 보였다. 우리의 손으로 첫 대회를 연 것은 YMCA가 1928년 2월에 YMCA체육관에서 제1회 조선탁구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한 것이다. 이후 해방이 되자 1945년 11월 조선탁구협회가 발족되고 전국선수권대회가 개최되어 국제 진출의 기틀을 잡았다. 1952년 제1회 아시아탁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국제 대회에 참가한 한국은 1956년 도쿄에서 열린 제23회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여자 5위 남자 14위를 차지한 후 더욱 발전하여 1973년 4월에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정현숙이 주축이 된 여자 팀이 단체전에서 일본, 중국의 강호를 물리치며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여 탁구는 물론 구기 사상 최초로 세계 정상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 이후로도 우리나라 탁구는 세계 최강의 전력을 유지하며 국제무대에서 위상을 떨치고 있다.
전주시탁구협회 임원현황
엄윤상
전주시태권도협회 역사
고대 한반도의 부족국가들에게는 제례 의식으로서 가무, 유희 등이 존재했는데 이와 같은 몸짓들이 대결 구도로 잡히면서 축제의 일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본다. 즉 원시적인 형태의 스포츠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족 간의 잦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무술이 발생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이 실용적인 목적으로서의 무술과 진전 제례 행사로서의 목적이 융합되면서 한민족 고유의 무술 태권도의 원형이 갖춰진 것으로 여겨진다. 태권도에 관한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는 많은 편이다. 특히 고대의 고분 벽화나 불상, 서적 기록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고분 벽화 중의 하나로, AD 209∼AD 427년, 당시의 고구려의 수도였던 현재 만주 집안현 통구에 있는 무용총 현실 벽화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벽화에는 두 사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주보며 손·발로 상대를 공격할 듯한 자세를 보여 오늘날의 태권도 경기 동작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이나 분황파 9층석탑의 인왕상 등의 몸동작은 태권도의 품과 유사하다. 또한, 백제의 경우,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 조정에서 백제의 대좌평 지적을 초청해 일본 건아들과 상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일본인들에게 선진문화권인 백제인들이 맨손무예를 지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고려에 와서는 삼국시대에 행해지던 택견(태권도)이 체계화된 무예로서 무인들 사이에서 활발히 행해졌다. 『고려사』에 보면 태권도가 ‘수박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을 여러 건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이의민은 수박희를 매우 잘하므로 의종 임금은 이를 사랑하여 대정에서 별장으로 승진시켰다.”, “임금이 상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 “임금이 화비궁에서 수박희를 보셨다.”, “말바위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수박희(태권도)는 무예로서뿐만 아니라 스포츠로서 제 삼자가 관람 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서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근세 조선에 와서도 고려 때와 비슷하게 무인들 사이에 수박희(태권도)가 계속 성행했다. 더욱이 대중화된 경기가 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행하게 되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작지 마을에서 양도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로서 승부를 다투었다는 기록에서 수박희는 무예로서만이 아니라 스포츠로서도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태종실록』권 19에 보면“병조의 의홍부에서 수박희로서 인재를 시험하여 방패군에 보하되 3인을 이긴 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군사로 하여금 수박희를 행하도록 하고 구경했다.”『( 태종실록』권32)는 기록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수박희는 실전에서도 사용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한민족 탄압이 강화되기 시작하고 항쟁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백성들의 무예수련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독립군, 광복군 등 항일조직의 심신 훈련방법으로서나 개인적인 무예 전승 의지에 따라 태권도(태견)의 명맥은 미미하지만 민족의 숨결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해방 후 잊힌 우리의 태권도를 되찾자는 뜻 있는 이들이 모여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점차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게 되어 드디어 1961년 9월 16일 대한 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2월 23일 대한체육회에 27번째 가맹단체로 가입되어 1963년 10월 9일 전주에서 개최된 제44회 전국체전에 태권도가 공식경기로 처음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바탕하에 전 세계로 진출한 태권도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태권도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대중 스포츠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전주시태권도협회 임원현황
신재룡
전주시택견회 역사
택견은 두 사람 이상의 사람이 어울려 기량이나 승부를 가르는 경기이자 놀이로서, 우리 민족이 발달시켜온 맨손 무예이며 민속놀이입니다. 아무런 장비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며 발길질을 위주로 하며, 상대를 차거나 걸어서 쓰러트려 승부를 가름합니다. 경기와 놀이를 위한 유희적 기법이외에도 한편으로는 인명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무술적 기법도 함께 전해 오고 있습니다. 택견은 인류가 시작될 때부터 자연 발생하여 우리민족의 개성으로 발달하여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문헌에는 “고려사”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나 실제로는 훨씬 이전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맨손무예가 왕으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성행하였고 맨손무예의 기능으로 승직(昇職)이 결정될 만큼 제도적으로 장려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조선시대 초기까지 이어졌으나 조선조의 사회가 차츰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하게 여기는 사회로 흐르면서 맨손무예는 지배계층으로부터 소외되고 대신에 기층 민중들에 의하여 전승되었습니다. 정조 때 간행된 <재물보>에는 각종 문헌에 나타나있는 변(卞), 수박(手搏), 각력(角力), 무(武) 등의 한자용어가 곧 택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전주시택견회 임원현황
강인섭
전주시테니스협회 역사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라뽐므(La Paum)’라는 경기가 테니스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1360년경 영국 사람들이 이 경기를 자국에 소개할 때 ‘테네즈(tennez)’ 하여 즉, ‘공을 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에서 테니스라는 명칭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테니스 명칭의 효시가 되었다. 당시의 경기는 맨손으로 할 경우 손바닥이 너무 아파 장갑을 끼고 시행했는데 이것이 조금 더 발전하여 15세기 후반에 라켓을 개발하게 된다. 1877년에는 제1회 영국선수권대회가 윔블던에서 열려 지금까지도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이어져오고 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나, 프로 선수의 참가가 문제 되어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올림픽대회부터 경기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서 64년 만에 다시 정식 종목으로 부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테니스 경기가 시작된 것은 1900년대부터였다. 1908년 4월 탁지부(현재 재경부) 관리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회동구락부를 조직한 뒤 테니스 코트를 마련해 경기를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테니스의 시초라 한다. 1927년 9월 24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용산의 철도국 코트에서 일본 오사카 매일신문사 경성지국 주최로 제1회 테니스선수권대회가 열렸으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열린 최초의 테니스 경기이다. 1948년 6월 1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대한 테니스연맹이 주최한 제1회 전국일반학생테니스대회가 열렸으며, 1949년 4월 17일에는 테니스연맹이 일반인과 대학생의 경기를 개최한 바 단복식 모두 학생팀이 승리를 하였다. 그 후 1953년 9월 테니스협회는 대한체육회에 정식으로 가입했으며 대한테니스협회(The Korean Lawn Tennis Assocition)로 명칭을 바꾼 협회는 1954년 5월 16일 서울운동장 코트에서 한미 친선 테니스대회를 개최하였다. 1960년부터는 국제 경기의 진출도 활발해졌으며, 1970년 이후부터 테니스 붐을 타고 우리나라에 급속히 보급ㆍ발전하여, 1982년 2월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었던 제9회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은 4개 종목에서 우승, 테니스 한국의 앞날을 밝게 해주었다.
전주시테니스협회 임원현황
최낙준
전주시특공무술중앙회 역사
제4공화국 당시 급변하는 세계 정서와 혼란한 국내 정세로 인하여 각 종 범죄발생 빈도가 급증하고 테러의 위험이 대두되자 대통령 경호실에서는 완벽한 경호이무 수행을 위해 1978년 6월 대 테러부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1978년 11월 개발한 새로운 무술을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에게 시범을 보이자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바로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가 되어 시범준비를 하던 중 무술의 명칭을 특공무술로 하사 받고, 1978년 6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청와대 연무관에서 시범을 보이게 되었다. 시범 후 특공무술이 특수임무 수행에 가장 적합한 무술이라는 평가와 함께 청와대 전 직원들은 물론 전 군에 보급하여 방 전투력 증진에 힘쓰라는 임무를 부여 받고 계속적인 연구와 새로운 기법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79년 8월에는 특전사령부 연병장에서 시범을 보였고 예하 공수여단에 보급 개시함으로써 특공무술이 군의 정규교육과목으로 채택되어 오늘까지 장병들의 체력단련과 정신수양뿐만 아니라 특수임무 수행에 일조를 하고 있다.
전주시특공무술중앙회 임원현황
김창고
전주시파크골프협회 역사
파크골프란, 파크라는 뜻의 공원과 골프가 더해진 합성어다. 공원은 자연풍경지를 보호하고 국민이나 주민의 보건 휴양 및 정서생활의 향상에 기여할 목적으로 만든 곳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 공간이다. 파크골프는 위의 배경을 토대로 하여 공원 개념에 골프의 게임요소를 합쳐, 적은 부지에서 어린아이부터 어르신 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골프를 재편성한 커뮤니케이션 스포츠이다. 파크골프는 최초로 1983년 일본 훗카이도의 동부 지역인 '마쿠베츠'에서 탄생하였고, 우리나라에는 1998년 경상남도 진주시의 상락원(노인복지회관)에 최초의 6홀짜리 파크골프장이 탄생하였다.
전주시파크골프협회 임원현황
태재은
전주시패러글라이딩협회 역사
낙하산과 글라이더의 장점을 합하여 만들어낸 항공 스포츠로 별도의 동력 장치 없이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활강하는 레포츠이다. 패러글라이딩이란 패러 슈트(낙하산)와 글라이딩의 합성어인데, 글자 그대로 낙하산의 안정성, 분해, 조립, 운반의 용이성 그리고 행글라이더의 활공성과 속도를 고루 갖춘 이상적인 날개형태로 만들어졌다. 패러글라이딩은 패러슈팅과 행글라이딩의 비행 원리를 이용해 고안되었으며 바람에 몸을 실어 활공과 체공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스릴만점의 레포츠이다. 1984년 프랑스의 등산가 Jean Mark Cuovins가 낙하산을 개조하여 처음 패러글라이더를 만들어 비행에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패러글라이더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쉽고, 간단하게 배워 비행을 즐기자 그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각국 항공협회 산하 행글라이딩협회 내에 패러글라이딩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국제항공연맹(FAI : Federation Aeronautique Internationale) 산하 국제행글라이딩위원회(CIVL : Commission International de Vol Libre)에서도 그 조직 내에 패러글라이딩 분과를 구성하여 새로운 항공 스포츠로 성장하게 되었다. 국내에는 1986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레져 스포츠 중에서도 인간의 마지막 스포츠, 최첨단 두뇌스포츠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전주시패러글라이딩협회 임원현황
이상율
전주시프리테니스협회 역사
프리테니스는 연식 테니스의 약 10분의 1 정도의 코트에서 할 수 있는 종목이다. 탁구의 손쉬움과 테니스의 다이나믹한 동작을 동시에 가진 새로운 유형의 스포츠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뉴스포츠이다. 프리테니스의 시작은 태평양 전쟁 후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과 그 가족이 즐기던 패들테니스에서 힌트를 얻어 일본인 요시다 다다시와 아오키 타이로가 프리테니스라 명명하고 경기규칙을 확립시켰다. 우리나라는 2003년에 사업가 정한근씨가 일본에서 도입하여 프리테니스 용구와 규칙 등을 한국인에 알맞게 변형하여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보급하였다. 프리테니스는 독일, 브라질, 미국, 유럽 등 각 나라의 생활체육으로 빠르게 확산 보급 되고 있다. 2004년 말에 국내에 도입되어 연합회가 구성되고 크고 작은 대회가 열리고 있다. 학교나 중, 장년층 클럽에서 특히 많은 호응을 얻고 있으며 직장인 클럽으로도 널리 정착되고 있다. 앞으로 프리테니스는 쉬운 접근성과 탁월한 운동 효과로 인해 세계적인 생활스포츠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된다.
전주시프리테니스협회 임원현황
임기대
플로어볼(Floorball)은 남녀노소 누구나 하키의 재미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스포츠 종목으로 빠른 스피드와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플로어볼은 농구코트보다 약간 넓은 플로어(floor)에서 부드러운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진 스틱과 볼을 사용하여 두 팀 간에 시합을 치러 정해진 시간 동안 상대팀보다 더 많은 점수를 얻은 팀이 승리하는 스포츠 경기를 말한다. 2004년 5월 22일 공식적으로 대한플로어볼협회가 창립되었으며, 2005년 첫 남자부 국가대표 팀이 발족되어 싱가포르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였다. 2018년 교육부 통계자료에 의하면 정식으로 등록된 초,중,고등학교 플로어볼 스포츠클럽은 1,149개, 학생선수는 13,232명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학교체육수업 및 레크레이션으로 플로어볼 종목 활동을 하고 있는 인구는 약 15만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스포츠이다.
전주시피구협회 역사
흔히‘피구’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공격 팀이 수비 팀 선수에게 공을 던져 맞추어 아웃시키는 게임이다. 도지볼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손쉽게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볼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나 누구나 언제라도 즐길 수 있다. 도지볼의 규칙은 어린이들의 적극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고안되었다. 운동을 잘하지 못하는 어린이도 주목받을 수 있는 스포츠이다. 도지볼의 발상지는 영국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원형은1900~1904년경 미국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는 방어조가 잡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날라 오는 볼로부터 몸을 피하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일본에는 1909년 원형데드볼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이후 동경사범학교의 오오타니 교수에 의해 도지볼로 개명되었다. 우리나라의 피구경기는 고구려 시대부터 부락 또는 지방단위로 편을 갈라 하던 석전이라는 우리나라 민속놀이가 고려시대의 ‘편쌈’을 거쳐 조선시대 까지 행하여 졌으며, 주로 단오를 비롯하여 설날, 동기, 성상절일(임금의 탄생일) 같은 국가경축일에 행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근대에 와서는 협동심과 단결력을 길러 주는 놀이로서 운동장에 줄을 긋고 콩 주머니로 상대편을 맞추는 놀이 등을 많이 했다. 현대에 들어선 공을 가지고 선을 그려 던지고, 맞추고, 피하기를 하는 놀이 형태의 피구를 비롯하여 지금의 짝 피구, 여왕피구, 보디가드 피구 등의 변형피구를 만들어 학교 및 단체행사 등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즐겨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팀을 나누어 게임을 한 것이 피구의 시초가 되어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경기 룰을 도입하여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즐길 수 있는 경기방식을 보급하여 국민 스포츠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전주시피구협회 임원현황
전주시합기도협회 역사
무술의 일종으로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된 것으로, 기술의 유형에는 꺾기, 던지기, 치기, 찌르기, 차기 등이 있다. 인도에서 시작된 체술을 기본으로 하여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 전파된 것을 1925년경 일본인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監平)가 체계화하였다. 그는 최초의 합기도 도장을 열고 ‘합기도’ 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무술의 영역으로부터 확장시켜 건강법, 호신술, 레크리에이션 등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합기도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 동학혁명 및 각 종 농민운동을 통하여 기지방어 및 군사훈련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일제 침략시절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민족무술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최용술, 장인목 선생 이하 뜻있는 무예인들의 뼈를 깍는 무술기행과 입산수도 등으로 보다 과학화, 체계화 되었으며 수많은 역사고증을 통해 각 종 족술 및 사장되어가던 무기술을 첨가하여 명실상부한 우리나라의 정통 합기도가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 후 제자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우리 합기도는 더욱 발전했으며, 1960년대 미국, 캐나다, 스페인, 월남 등지에 보급합으로서 국제적인 무술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스페인은 자국의 경찰무술로서 합기도를 국회에서 인정받았을 정도로 우리 합기도의 우수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었으며 현재 전 세계 70여개국에 뿌리를 내려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무술로서 자리잡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생활체육 합기도로 더욱 더 계승 발전하고 있다.
전주시합기도협회 임원현황
장완성
전주시브리지협회 역사
브리지의 기원은 유럽 귀족이 즐기던 휘스트 게임에서 유래가 되었다. 1925년 미국 철도업계의 거물 밴더빌트 가문의 해럴드 밴더빌트에 의해 콘트랙트 브리지로 정착 오늘날에 이른다. 1930~1940년대엔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브리지 열풍'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지금도 1백 30여개국에서 4천만명이 넘는 사람이 브리지를 즐기며, 연중 크고 작은 대회가 열린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과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먼저 브리지 게임은 네 명이 즐기는 게임이다. 네 명이 한 테이블에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않아 마주 보는 사람끼리 한팀이 된다. 팀 게임이기에 파트너 사이의 소통과 믿음, 호흡이 매우 중요하다. 브리지를 오래 한 사람일수록 브리지의 가장 큰 매력으로 파트너십을 꼽는다. 다음은 브리지 게임에서는 요행이 통하지 않는다. 브리지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 플레이하며, 상대방을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는 두뇌 게임이다. 좋은 패든 나쁜 패든 나눠 받은 13장의 카드에 따라 수 많은 경우의 수를 따지며, 확률과 통계에 근거해 점수를 쌓아간다. 브리지의 묘미는 비딩을 통해 파트너끼리 스스로 획득할 목표를 콘트랙트하고 플레이하면서 그 콘트랙트를 달성하는 데 있다. 브리지 종목이 국내에 알려진 건 1960년대의 일이다. 미군 부대와 외교관 사이에서 조금씩 알려지다 귀화 1호 미국인이자 천리포수목원 창립자인 민병갈 원장의 노력을 통해 본격적으로 보급되었고, 이제는 고인이 된 신의민 선생이 백화점 문화센터 등을 통해 다양한 클래스를 열어 체계적으로 브리지를 배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993년 한국브리지협회(KCBL)가 창설되어 조직적으로 대회를 유치하기에 이른다. 2009년 대한체육회로부터 인정 단체로 승인 받은 한국 브리지 협회엔 현재 4백여 명의 정회원과 2천여 명의 준회원이 활동 중이다.
전주시브리지협회 임원현황
문병철
전주시수상스키웨이크보드협회 역사
수면을 미끄러질 수 있는 스키를 타고 모터보트에 매달려 달리는 스포츠다. 서핑과 스키의 특징이 결합된 형태로 조정력, 예측력, 균형 감각을 익힐 수 있는 전신운동이다. 수상스키는 1922년 미국의 랄프 새뮤얼슨(Ralph Samuelson)에 의해서 창안되었다. 그는 여름 내내 물 위에서 스키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결국 비행정에 2.7m의 송판 스키를 매다는 방법을 사용해 처음 개발하였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의 수상스키가 개발되었다. 최근에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고도 저렴한 보트가 출시되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여가 시간이 많아지고 이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레크리에이션 활동의 일환으로 수상스키를 즐기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주5일제 근무가 확대되면서 레저 스포츠의 관심 증대와 함께 동호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전주시수상스키웨이크보드협회 임원현황
이승준
전주시파워보트협회 역사
특수하게 개조된 모터보트로 시속 200㎞대의 속력을 즐기는 여름 수상 레저 스포츠. 공식명칭은 파워보트 레이싱 크레프트(powerboat racing craft)이다. 서핑 보드에 모터보트 엔진을 결합시킨 것으로 서프제트와 달리 앉아서 즐기는 레저 스포츠이다.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지중해 연안을 찾은 자동차경주 마니아들이 자동차경주 대신 즐기기 위하여 모터보트를 개조한 데서 유래되었다. 현재 국제모터보트연맹(UIM:Union Internationale Motonautique)이 해마다 서유럽과 동구권, 아시아 지역 등을 돌며 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창원 국제모터보트 그랑프리대회'가 열린다. 종류는 1인승과 2인승이 있으며, 앉은 상태에서 몸 전체를 움직여 방향을 조절한다. 크기와 무게, 최고 시속은 서프제트와 비슷하며 보드 양 옆에 달린 노끈을 손으로 잡아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오른쪽 노끈 손잡이 옆에 부착된 변속기 레버를 엄지손가락으로 움직여 속도를 결정한다. 경기방법은 시속 200㎞대의 속력으로 호수나 바다 위에 떠 있는 서킷을 규정된 횟수만큼 도는 것으로 엔진의 성능보다는 운전기술이 우승을 좌우한다.
전주시파워보트협회 임원현황
이준태
e스포츠(esports, Electronic Sports) 혹은 사이버 스포츠(Cyber Sports)는 전자 스포츠란 뜻으로, 비디오 게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스포츠를 일컫는 말이다. 이스포츠(전자스포츠) 진흥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의 정의에 의하면 "게임물을 매개(媒介)로 하여 사람과 사람 간에 기록 또는 승부를 겨루는 경기 및 부대활동"을 말한다. 일반적인 스포츠와 달리 육체적인 능력보다는 정신적인 능력을 위주로 펼쳐나가기 때문에 정신 스포츠(멘탈 스포츠, mental sports)로 분류되며 컴퓨터/비디오 게임을 통해서 경쟁해나가는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다.[1] 과거의 전자오락은 말 그대로 오락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1990년대 후반 이후로 게임 산업이 급격히 발전하는 동시에 프로게이머가 등장하면서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발달하자 e스포츠(esports)로 불리게 되었다. 또 다른 말로는 사이버 스포츠라고도 한다. 국내에서 e스포츠란 단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9년 말에서 2000년 초 부터다.
MMA는 다양한 격투기 기술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격투기의 한 종목으로 권투·레슬링·태권도·유도 등 서로 다른 격투기 종목 간의 대결이었던 이종격투기에서 기원했으나, 1990년대 이후 독립적인 격투기 종목으로 체계화되었다. 급소 공격과 같은 반칙 행위를 제외하고 때리고, 던지고, 잡고, 꺾고, 조르는 다양한 격투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전 세계 수백 개의 종합격투기 단체가 대회를 개최하며, 미국의 UFC가 대표적인 종합격투기 대회이다. 한국에는 로드FC가 있다. 한국에서는 2003년 4월 이종격투기대회 ‘스피릿MC(Spirit Martial Challenge) 대회’가 개최된 이후 네오파이트·WFK세계챔피언전·코마그랑프리·스트라이킥 같은 이종격투기대회가 탄생했다. 종합격투기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이와 같은 개별 격투기 종목 선수들 간의 이종격투기 대회가 대중의 큰 관심을 받으면서 탄생했다. 1993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처음 개최된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는 현대적인 종합격투기의 기틀을 잡은 대회이다.
드론축구는 완벽하게 보호된 드론볼을 이용하여 공중에 원형으로 매달린 골에 더 많은 득점을 한 팀이 이기게 되는 미래형 스포츠이다. 한 팀은 5대의 드론으로 구성되며 이 중 상대의 골을 통과하여 득점할 수 있는 드론은 스트라이커로 지정된 한 대뿐이다. 다른 볼들은 수비 또는 득점을 돕기 위해 상대 수비를 쳐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경기는 3세트 세트 득실로 진행되며 한 세트는 3분 동안 진행된다. 드론축구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3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굉음을 내는 빠른 드론이 쉴새 없이 날아다니며 공격과 수비를 하다 보니 선수들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며 이를 지켜보는 관중들 또한 잠시라고 쉴 틈이 없다.
한 민족의 역사적 전통으로 내려오는 고유한 형식의 경기. 우리나라에는 씨름, 그네뛰기, 널뛰기, 활쏘기, 줄다리기 따위가 있다.
하와이의 전통 춤으로 노래와 리듬에 맞춰 추는 것이 특징이다. 라이온 킹에서 티몬이 선보인 적이 있다. 옛날 하와이는 문자가 없어서 훌라춤으로 전해주었다고 한다. 사실 노래 등등의 공연예술로 지식을 전수하는 것도 세계적으로 그렇게 희한한 일이 아닌데, 일단 우리가 아는 드루이드나 바드가 바로 이걸 하는 계층이었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추는 춤이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여성들이 주로 추는 춤으로 인식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해외전용이고 여전히 남성들도 추는 춤이다. 남성들이 추는 걸 보면 상당히 힘있고 다부진 동작이라 여성이 추는 춤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준다. 하와이 전통 음악 또는 대중음악에 맞춰 추는데 손동작이 일종의 수화로서 가사에 나오는 단어를 따라가는 것이 특징이다. 훌라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쿠무라 부르며 단지 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지식 문화 지혜를 전승하는 스승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위에 설명된것과 같이 훌라가 전통적으로 지식등을 전수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훌라후프는 이 춤에서 유래하였다.